청대신문

기획

  • 청대신문
  • 기획
기획 상세보기, 제목, 카테고리, 내용, 파일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기획】 뜨거웠던 충북의 ‘5월’ – 공간은 기억을 갖는다
카테고리 기획


▲ 청주제일교회 앞 청주기독청년회 등은 교회 100주년을 맞아 교회 앞에 민주화 운동의 빛나는 역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 사진=이아연 수습기자




▲ 지난 4일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사진=맹찬호 기자

 
 
 
∎ 5·18 민주화 운동 41주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 국가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41년 전만 해도 국민의 주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였다. 
 
 1980년 5월 광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당시 신군부세력은 권력의 공백 상태임을 알고 군대를 동원했다. 당시 보안 사령관으로 군대와 국내의 정보를 폭넓게 파악하고 있던 전두환과 일부 군부 세력은 반란을 일으켜 지휘권을 장악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독재 청산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런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계엄군은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고, 이를 계기로 혼란스러운 시위 현장이 만들어졌다. 계엄군의 계속된 폭압에 병원에는 부상자가 넘쳐났고 결국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21일 오후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거세지자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가족을 잃었다. 가족들과 민주주의를 지켜야 했던 시민들이 스스로 무기고를 탈환해 계엄군과 총격전을 이어가자 결국 22일 계엄군이 철수했다. 
 
 당시 충북 지역에서도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학생이 신군부에 연행돼 모진 탄압을 받았다. 충북 지역은 지난 60여 년간, 서울과 광주, 전남, 부산 등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지역과 다름없이 민주주의를 향한 파도를 함께 타며 현대사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수많은 헌신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은 역사적 조명이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우리대학 구성원들은 충북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우리대학 대학(원)생, 직원, 교수를 대상으로 한 ‘민주화운동 인식 관련 설문조사’에는 총 24명이 응답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라는 질문에 응답자 전체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역사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충북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의 질문에는 응답자 중 87.5%(21명)가 ‘아니요’, 12.5%(3명)이 ‘예’라고 응답했다. ‘예’로 응답한 인원 가운데 몇몇은 충북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일어난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확한 정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편, 충북 민주화 운동을 알지 못한 응답자 21명 중 ‘아니요’를 선택하셨다면 ‘충북 민주화운동에 대해 배울 기회가 생긴다면 배울 의향이 있으신가요?’의 질문에 19명(90.5%)가 알고 싶다고 밝혔다. 충북 민주화운동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싶은지에 대해 응답자 중 몇몇은 “누가 주도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했나요?”, “언제 일어났고 대표적인 사례가 궁금하다” 등 전체적인 배경과 주요 활동에 대해 궁금하다는 의견을 남겼다.
 
 
∎ 충북에 남아있는 민주화 운동의 흔적
 1980년 충북에서 발생한 5·18 민주화 운동의 흔적은 청주제일교회에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뿐이다. 청주 제일교회에는 충북지역 기독청년운동, 기독여성운동, 민주화 운동의 요람이라고 적혀있는 기념비가 있다. 청주고 출신이며, 제일교회 소속 청주 기독교 청년이었던 최종철 열사는 당시 5월 7일부터 시작한 충북대 5월 민주 시위에 참여해 5·18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듬해 석가탄신일 특사로 석방됐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했던 최종철 열사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청주 기독청년회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은 최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매해 진행했고, 1984년 11월 14일에는 제일교회 공원묘역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이후 최종철 열사가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포상되자 추모비는 남이면 양촌리 교회 동산으로 옮겨졌다.
 
 우리대학 역시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충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충북민주화운동사에 따르면 5월 이전에는 학원 민주화와 학원 자율화에 더 중점을 맞췄으며, 5월부터는 학원 민주화와 함께 사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도 전개됐다고 한다. 당시 우리대학 학우들은 본격적인 시국 시위에 나섰다. 8일에 시위 대열이 정문 밖으로 진출했으며, 9일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12일 이후에 다시 시위가 전개됐는데, 13일에는 정문을 뚫고 선도 대열이 상당공원까지 진출했다. 15일 오전에는 집회 후, 정문에서 경찰들과 충돌했다. 오후에는 2,0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상당공원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이틀 후 전국적으로 실시된 비상계엄령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됐기 때문이다. 
 
 
∎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증인 김재수 씨를 만나보다
 우리대학 학우는 아니었지만, 충북대 재학생이었던 현 우진교통 대표 김재수 씨와 인터뷰를 통해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들어봤다. 
 
 청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김 씨는 1978년 충북대 재학 1학년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 시위를 하다 처음으로 잡혀갔다. 그 이후 1980년 전두환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오월의 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학생 시위에도 참여했다. 김 씨는 수많은 학생이 시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박정희 시대의 20년간 억눌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많은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이 서울역으로 모여 전두환 체제 반대 시위를 했다. 많은 인원이 함께 청와대로 갔으나 중간에 지도부가 학생들을 학교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에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때, 5월 17일 밤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그들은 다시 반대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충북 그중에서도 청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만들고, 공청회도 열면서 3월 개강을 맞이했다. 신학기가 됐는데 군권을 장악한 하나회 군인들의 노골적인 정치 욕이 보이자 학생들이 반전두환 반노태우를 중심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3월 중순부터 시작해 두 달 정도 공방전을 벌이다가 5월 15일 청주대, 충북대, 서원대(당시 청주사대) 학생들이 상당공원에서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연합집회를 하다가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장되면서 주요 리더들이 체포됐다. 1980년 청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고 한다.
 
보안대에서의 잊고 싶은 기억들
 김 씨는 계엄령이 퍼지고 난 이후 음성, 영동, 대구 등으로 피신했다가 한 달 만에 전국지명수배가 내려지고 자수했다. 자수 이후 보안대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에 대해 김 씨는 “얼굴하고 겨드랑이, 사타구니만 빼고 다 시퍼랬다”고 전했다. 그는 보안대 내부의 모습에 대해 “사무실 3분의 1만한 방 크기였고, 책상이 하나 있었으며, 거기에는 전기고문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벽 한 면은 유리였다. 밖에서는 나를 볼 수 있고, 나는 밖을 볼 수 없는 유리다. 마지막에는 때릴 곳이 없어서 의자에 다리를 올려놓고서 발바닥을 때렸다”며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지명수배자가 되고 이리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유는 보안대에서 자신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에 그게 잘 안 되자 집을 압수 수색해서 나온 김지하 시인의 시집 <황토>와 <오적>이 나온 것으로 현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당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나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나에게서 끝나지 않으니까 고등학교 동창을 데리고 와서 나 대신 고문을 받게 한 것”을 이야기했다. 징역 3년을 받았지만 2심에서 선고유예가 나와 7개월 동안만 징역을 살았다. 그러나 나와서도 강제 징집을 통해 소위 녹화사업이라는 것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공통보다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편치 않은 잠자리가 종종 있다고 했다. 육체적으로는 고문의 후유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원인을 모르게 다리가 아팠다고 했다.
 
 현재는 민주화보상법에 의거 무죄 판결을 받고 그에 따른 민형사상의 일정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보상금의 절반을 자신이 만든 장학회인 ‘울타리 꽃 장학회’에 기탁했다. 국가 유공자가 돼서 거기에 따른 의료비나 교육비 혜택 등이 있지만, 이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종철이형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최종철 열사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80년 5월 학사 일정이 운영되지 않자 청주로 올라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펼쳐나갔다. 징역을 살고 나와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했지만, 부모님은 유품은커녕 유골조차 없애려고 해 김 씨와 다른 사람들이 추모비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현재 최종철 열사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인치돼있어 광주에 갈 때마다 그를 보러 간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말했다. 박정희 체제 시절에는 학내에 경찰들이 상주하고 미행이 붙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7개월 동안은 엄청난 희망과 역사의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
 마지막으로 그는 “민주화운동은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흐름의 문제였다. 이미 TV 등 여러 가지 매체에서 많이 나오는데, 우리 지역 같은 경우에는 자료도 없고, 연구하는 분도 없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 시간이 흐름에도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그 당시 살았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동시에 중요한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 민주화운동, 잊지 말고 기억하자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현장이라면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다.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1981년 소설가 황석영이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묏비나리’라는 시를 개작한 가사에 당시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작곡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가 운명한 윤상원과 광주의 노동 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추모하며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노래는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이 추모 때마다 부르며 민주화 시위 현장의 대표적 민중가요로 확산했다. 하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식전 합창단이 부르는 것으로 대체되고 식순에서 제외돼 제창할 수 없었다. 일각에서 제목과 가사에 들어 있는 ‘님(임)’과 ‘새날’이 북한의 김일성과 사회주의 혁명을 뜻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제창을 둘러싼 논란은 이념 갈등으로 비화했다. 8년이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취임 이틀 만에 ‘업무지시 2호’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을 지시해 비로소 해결됐다. 이에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는 참석자 모두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매년 제창되고 있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던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과제를 수행하는 단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충북 민주화 운동사’ 연구총서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정리하는 것은 국가가 왜곡한 기억에 도전하는 것이며 현재진행형인 민주화운동으로서 기억 투쟁의 의의가 있다고 전한다. 이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를 향한 것이며, 또 동시대인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의 밖에 있던 이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지역’이란 개념은 지도상, 행정상으로 구분되는 특정 영역이란 뜻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흔히 ‘중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상위’와는 다른 ‘하위’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도 이는 유감스럽게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하나의 지역으로서 ‘서울’이 아니라 서울이 곧 ‘중앙’ 이었기에 그동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헌신과 성과가 있었음에도 지역이 역사적 조명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돼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전하며 민주화 운동사 정리의 나선 이유가 담겨있다.
 
 역사는 공감과 연대를 통한 증명으로 구체화 되고 힘을 얻는다. 그러나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41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이뤄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거의 없는 현실이다. 상대적으로 역사적 조명에 소외돼왔던 ‘충북지역’ 민주화운동 흔적을 재조명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분투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맹찬호 기자, 이아연, 이정은 수습기자>
파일

담당자 정보